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판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이후 == 사이판 점령 후 미 육군은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제21폭격기사령부]]를 배치해서 목표했던 [[B-29]]에 의한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미국은 사이판 점령으로 태평양에서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전선에 편하게 집중하여 [[독일군]]을 맘껏 유린한다. 물론 사이판을 점령하기 이전에도 중국에 배치된 기지에서 B-29가 출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긴 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B-29에게도 부담이 될 정도였던데다, 아직 중국 본토와 제대로 된 육상 보급로가 연결되지 않아서 항공편으로 찔끔찔끔 보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험한 지형과 기상 환경 탓에 적지 않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는 건 덤. 하지만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이판에서 출격하면 B-29로 일본 본토까지 충분히 왕복이 가능한데다, 해상 보급를 통해 안정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판 전투가 [[일본 제국]] 수뇌부에게 준 충격은 거대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패배했지만 사이판 전투의 패배는 여러모로 수뇌부에게 그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사이판 함락 이전의 전투들은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역]]과 같이 공격전이 실패했거나, [[알류샨 열도 전역#s-3.2.2|애투 섬 전투]]와 같이 전략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곳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타라와 전투]]와 같이 지연전 목적으로 확장해 놓은 전선에서의 방어전이었거나 하는 식이어서 수뇌부 입장에서도 패배에 대한 변명거리가 충분히 존재했다. 제대로 된 방어망이 여유를 가지고 구축된 곳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방어전에서 일본군이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쟁 전부터 일본이 위임통치했던 지역인 사이판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벌인 전투에서 육군과 해군이 전멸을 당하면서, '우리 구역에서 맘먹고 제대로 싸워도 일본군이 힘을 못 쓰고 깨지는구나' 라는 사실을 수뇌부들이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 말 그대로 진검승부라고 여겼던 전투에서 그야말로 학살을 당하면서 '이쯤 되면 우리가 빠져야 될 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전 [[임팔 전투]] 때만 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던 [[히로히토]] 덴노도 이 때를 기점으로 의견 개진을 중단한다.[* 최악의 경우 덴노 만큼은 전쟁과 무관한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본영의 방침이 반영되었다.]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군의 [[절대국방권]]은 산산조각났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이 붕괴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해군군령부총장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전후 미군 조사에서 >'''사이판을 잃었을 때 우리에게 지옥이 다가왔다.''' 라고 언급했으며, 고가 미네이치 제독의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은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라고 평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된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사석에서 일본이 승리할 확률은 '''3%'''도 되지 않는다고 평했으나 그 희박한 확률조차도 사이판 함락 후에는 '''0%'''로 떨어졌다. 즉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이판 전투와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해군의 항모기동부대가 전멸해 버렸다. >2.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3. 미군 잠수함의 작전반경이 크게 늘어났다. >4. 도조 내각 붕괴와 함께 일본 정부의 전쟁수행의지와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의 의한 출구전략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외교적 접촉이 가능했던 소련, 스웨덴, 스위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얻어내기 위해 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일:external/someinterestingfacts.net/Captain-Sakae-Oba.jpg]] 한편, 육군 제18보병연대의 [[http://en.wikipedia.org/wiki/Sakae_%C5%8Cba|오오바 사카에]] [[대위]]는 생존한 부하 장병들과 민간인을 모아 타포차우산(Mountain Tapochau)에서 1944년 7월부터 1945년 12월 1일까지 저항을 벌여 '사이판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옥쇄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반역자로 찍혔고, 비무장한 군인들을 공격한 적도 있었기에 미군에게도 비겁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51llWefEFaL._SY300_.jpg]] [[파일:external/www.imfdb.org/Oba_Poster.jpg]] 후에 그의 일화는 미 해병대 출신의 작가 돈 존스(Don Jones, 1924 ~)가 1982년에 출간한 실록소설인 'Oba, The Last Samurai: Saipan 1944-45'로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은 2011년에는 히라유마 히데유키 감독이 찍은 '태평양의 기적, 폭스라고 불리운 남자'라는 영화로 영화화되었다. 당연하게도 일본군은 잘 싸웠다라는 정신 승리가 대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